그래도 믿을 건 정치다 2025. 5. 16. 16:06

1. 정치인의 위선만이 문제일까?

정치적 은퇴를 선언한 이가 한국을 떠나 하와이에 정착했다더니, 그곳에서 더 활발히 한국 정치에 개입하고 있다. 정치인들은 정치에 염증을 느꼈다며 잠시 쉬겠다고 하지만, 그들의 SNS에는 더 선명하고 더 노골적인 정치적 메시지가 쏟아진다. 우리 사회의 신뢰는 이런 장면들에서 무너진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자. 과연 이 신뢰의 붕괴를 초래한 이들이 정치인만일까?

정치인은 손쉬운 희생양이다. 그들이 부도덕하고 위선적이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문제는 그들이 신뢰를 무너뜨리는 유일한 주체가 아니라는 데 있다. 오히려 이들의 행태를 소비하며 키워준 건 언론이고, 그 위선을 정당화하거나 침묵으로 일관한 건 지식인들이며, 끝없이 갈라치기에 환호하며 신뢰를 조롱한 건 시민들 자신이다.

2. 신뢰를 소비하는 사회, 그 파괴적 습관

오늘날 신뢰를 무너뜨리는 가장 강력한 힘은 아이러니하게도 '신뢰의 구조' 그 자체에서 비롯된다. 정치를 욕하면서도 정치에서 모든 문제의 해답을 찾으려 하는 집단 심리, 사실은 신뢰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익숙하기 때문에 그 구조에 안주하려는 우리 모두의 태도다.

기업을 보자.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외치며 광고판에 윤리적 기업임을 자랑한다. 그러나 내부에선 착취와 조작, 위선이 만연하다. 글로벌 기업의 CEO들은 사회적 가치와 인권을 논하지만, 그들의 사무실 책상 위 보고서는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채워진다. 정치는 이들을 감시하거나 견제하기는커녕 그들의 로비스트가 되어버렸다.

언론은 어떤가. 진실의 수호자를 자처하지만, 클릭 수와 광고 수익에 신뢰를 저당 잡혔다. 오보가 난무해도 사과 한 마디 없이 새로운 프레임을 양산한다. 신뢰가 아니라 충성심을 사고파는 장터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지식인과 전문가 집단도 예외는 아니다. 과학적 사실과 합리적 이성을 내세우지만, 그들의 다수는 자신이 속한 계층과 이익집단의 충실한 대변자일 뿐이다.

3. 신뢰를 무너뜨리는 건 바로 우리 자신

우리는 '정치 불신'을 말하지만, 사실 불신은 정치만의 문제가 아니다. 신뢰의 가장 깊은 균열은 이 사회의 시스템, 시장, 문화, 지식, 심지어 일상적 인간관계 속에서 퍼지고 있다.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것은 소수의 선동가만이 아니다. '나만 알고 있는 진실'이라며 검증되지 않은 정보에 몰려가는 대중 모두가 신뢰 파괴의 가담자다.

현대인은 어느새 '신뢰를 소비하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신뢰를 쌓고 축적하는 게 아니라, 즉각적 효용과 감정적 만족을 위해 신뢰를 갈아 넣는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사회는 신뢰의 속도가, 아니 정확히는 신뢰가 무너지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이제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신뢰는 복구할 수 있는가? 아니면, 이미 무너질 수밖에 없는 구조 위에 허망한 희망을 얹고 있는 것인가? 정치인의 위선적 쇼에 열광하며 박수치는 우리, CEO의 착취적 성장에 투자하는 우리, 클릭 수만 믿고 분노에 휩쓸리는 우리, 신뢰를 가장 먼저 팔아먹고 가장 먼저 배신당한다고 외치는 우리. 세상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건 바로 '우리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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