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결이 옳은 것인가 – 아니다. 하지만 옳은 것에 가장 근접한 것이다
다수결이라는 불완전한 질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결은 거의 절대적인 원칙처럼 작동한다. 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되는 방식, 정당 후보 선출, 심지어 동네 반장 선거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수없이 많은 순간에 다수결이라는 방식에 기대 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질문은 여기에 있다. 다수결은 과연 옳은가?, 다시 말해 다수가 선택한 것이 진리이거나 정의일 수 있는가?
직관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느껴진다. 역사를 보면 수많은 다수는 틀렸고, 소수가 옳았다. 갈릴레오는 다수의 믿음을 거슬렀고, 흑인 인권 운동은 다수의 차별적 통념에 저항했다. 히틀러는 독일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으며 권력을 잡았고, 일본의 군국주의도 민중의 지지를 업고 자라났다. 다수의 결정은 결코 ‘옳음’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다수결을 사용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다수결은 ‘옳음’ 그 자체는 아니지만, ‘옳음에 가장 근접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완전하지만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제도적 장치다.
다수결의 한계와 불가피성
1. 다수결의 논리적 결함
다수결이 옳음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은 여러 철학자와 정치이론가들이 지적한 바 있다. 플라톤은 ‘철인정치’를 주장하며, 무지한 대중이 아니라 철학자 왕이 통치해야 한다고 말했다. 존 스튜어트 밀은 다수의 폭정을 경계했고, 알렉시 드 토크빌은 ‘다수의 전제(tyranny of the majority)’라는 개념을 통해 민주주의 내부의 독재 가능성을 경고했다.
현대 사회에서도 다수결은 비윤리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지역 주민 다수가 특정 인종이나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거주를 반대한다면, 그 결정을 다수결로 정당화할 수 있는가? 다수의 의견이 소수의 권리를 억압할 수 있다면, 그 결정은 민주적일 수 있으되 정의롭다고 말하긴 어렵다.
2. 다수결의 실용적 효용
하지만 이런 논리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수결을 포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실 정치에서 완벽한 합의는 거의 불가능하고, 독재는 더 큰 위험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결정을 기다리다가는 사회는 아무런 결정도 하지 못하고 마비될 수 있다.
다수결은 때로 오답을 낳는다. 하지만 오답을 수정할 수 있는 절차 역시 다수결 안에서 작동한다. 잘못된 정권은 다음 선거에서 교체될 수 있고, 불합리한 법은 여론의 힘으로 바뀔 수 있다. 다수결은 오류를 되돌릴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최소한의 장치이기도 하다.
3. 대안의 부재: 합의제, 철인정치, AI 정치?
물론 다수결을 대체하려는 시도는 있었다. 합의제 민주주의는 모든 집단이 동의할 때까지 대화를 이어가는 방식이지만, 규모가 커질수록 비효율적이다. 철인정치는 이상적으로 보이지만, ‘철인’이 누구인지, 그 판단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의 문제에 봉착한다. 최근에는 인공지능이 공정하고 중립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지만, AI 역시 데이터를 제공하는 사람의 편향과 의도를 벗어날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이상적이지 않지만 현실적으로 작동 가능한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다. 그 방식이 바로 다수결이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개선 가능하고 회복 가능한 결정의 방식. 그것이 다수결의 미덕이다.
불완전함 속의 최선
다수결은 정답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도 아니고, 정의도 아니다. 다수는 틀릴 수 있으며, 실제로 자주 틀려왔다. 그러나 우리는 완벽한 정의가 아니라, 덜 나쁜 결과를 선택하는 정치를 하고 있다. 다수결은 그 속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가장 덜 위험한 방식이다.
민주주의는 완전한 이데아가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불완전한 선택과 타협의 역사 위에 서 있다. 그 속에서 다수결은 오류를 낳기도 하지만, 동시에 오류를 시정할 수 있는 문을 열어준다. 그 문이 완전히 열릴 수 있도록 하는 건, 단순한 숫자의 힘이 아니라 깨어 있는 시민들의 의식과 참여다.
우리는 다수결이 옳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다수결이 ‘옳음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수단’임은 인정해야 한다. 더 나은 대안이 없는 지금, 우리는 이 불완전한 방식을 더 나은 방식으로 다듬어가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진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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